이제야 어머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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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소연 작성일12-07-18 10:22 조회20,570회 댓글0건본문
이제야 어머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소연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처음 한국으로 온 그 날은, 몇 년이 흘렀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 힘든 날이었습니다. 낯선 도시에서 다시 낯선 시골로 와서, 낯선 사람들 틈에 껴서 하루를 부대끼고 나니, 이제 내가 살아가야 할 곳은 이 낯선 한국 땅이구나, 새삼 친정 부모님, 고향이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졌었답니다.
한국에 도착한 그날은 해가 막 저물어 깜깜해 진 시간이었습니다.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주말이여서 그랬는지 길도 많이 막히고, 공항에서 출발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도착한 남편의 집은 작은 가로등으로 어둠을 밝히는 캄캄한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어떻게 짐정리를 끝냈는지, 시댁어른들에게 인사는 어떻게 드렸는지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정신없이 그날 밤이 지나가고, 다음날 일어나 마당에 나갔을 때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정말 삭막 그 자체였습니다.
띄엄띄엄 자리한 마을의 집들, 가깝고 먼 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시골 마을. 중국인 며느리를 맞이했다고 찾아오는 얼굴도 낯선 친척들. ‘아~! 이런 낯선 곳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가지!’ 한참을 먹먹한 마음으로 그렇게 서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머니는 제가 온 첫날 김장을 담으신다며, 아침부터 바쁘게 이것저것 재료들을 준비하셨고, 바쁘게 몸을 움직이셨습니다. 김장을 처음 담아보게 된 저는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랐지만, 어머님 시키는 대로 이것저것 옆에서 도와드리며 심부름을 해야 했습니다. 중국에서 오느라 하루 종일 버스에 비행기에 다시 버스에... 아직 여행의 피곤함도 가시기 전이었지만, 어머님 하시는 일이니 피곤하단 표현도 못하고 시키시는 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은 천근만근 몸살이 날 지경이었지만, 어머님은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시는 듯 했습니다.
김장을 하며 정신없이 첫날이 지나가고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어제 어머니와 함께 한 김장을 택배아저씨가 와서 거의 다 가져가셨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남편에게 물었더니, 해마다 김장철이 되면 시골에서 김장을 담아, 타지에 살고 계신 아주버님 두 분과, 시동생, 시누이에게 보내준다고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아무도 김장할 때 도와주지 않았는데 내가 힘들게 담은 김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불쾌했고, 이런 불쾌한 마음을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어 그냥 참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가 그렇다고 하니 그냥 그런 줄 알았고, 남편이 그렇다 하니 그렇게 넘겼습니다.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면, 이런 내 마음도 남편이나 어머님께 하소연이라도 할 텐데 속이 상했습니다.
얼마 후 제사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읍내 시장으로 어머님과 장을 보러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이 집안의 큰집이었기 때문에 준비할 음식들이 많았습니다. 시장을 보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나물거리, 여러 가지 부침 재료, 생선, 고기 등 많은 친척들을 대접해야 할 음식을 마련해야 했기에, 하나씩 재료들을 살 때마다 짐은 천근만근 무거워졌습니다. 어머니와 저, 둘이 그 짐을 들기엔 너무나도 무거워 힘이 들었습니다. 어머님과 힘들게 장에 다녀와서 어머니를 도와 처음으로 그 많은 제사 음식을 정신없이 장만하고, 대충 집을 정리하고 나니 밤이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한분씩 오시기 시작했고, 제사에 오신 많은 분들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설거지를 하고 뒤치다꺼리에 힘이 들 때쯤 내가 한국에 와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밤 중이 돼서야 손님들 돌아가고 피곤에 지친 내 앞에 또 할 일이 태산같이 쌓여 있었습니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추석에 성묘를 한 적은 있어도 지금껏 살면서 한 번도 제사를 지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많은 친척들을 먹이기 위해 아침부터 장을 보고, 음식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먹고 마시고 한참을 얘기하다 돌아가는 일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난 그냥 그 상황이 시끄럽고, 힘들고, 몸만 지쳐갈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저의 첫 한국생활은 힘들게 꼬여가기만 했습니다.
어머님은 이런 저에게 항상 타박만 하셨습니다. 친정 부모님이 그리워 전화를 하면 국제전화비가 얼마나 비싼데 날마다 전화만 하냐며 면박을 주셨고, 시골에서 할 일은 농사짓는 일 뿐인데, 제가 하는 일은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한다며, 시골에서 살려면 일을 잘해야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며,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사사건건 구박만 하셨습니다. 어머님의 야속한 말들은 내 가슴에 깊이 박혔고, 그럴 때마다 중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도 어머님 눈치가 보여 쉽게 전화 한 번 할 수가 없었고, 처음 해보는 시골일은 내 몸을 힘들고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왜 어머님은 날 예뻐해 주지 않을까? 왜 어머님은 항상 나에게 듣기 싫은 말만 하실까? 언젠가부터 내 마음속에 어머님에 대한 미운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어머님이 점점 야속해지기만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네’ 라는 대답을 ‘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말로 ‘응’은 반말로 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처음엔 어머님이 나에게 왜 어른 말에 자꾸 반말로 대답을 하냐고 혼을 내실까 짜증이 났습니다. 난 분명 어머님 물음에 반말을 한 적이 없는데, 자꾸 혼을 내셨습니다. 나중에야 남편 얘기를 듣고, 어머님이 왜 자꾸 날 꾸중하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일부러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 나에게 하나씩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싶어서 그러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에게 존댓말을 구분해서 써야 하고, 버릇없이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결혼하고 낯선 곳 와서 고생한다며, 예쁜 옷 한 벌 사 입고 오라고 10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주셨습니다. 어머님은 장날 함께 나가서 장구경도 하고, 옷도 사자고 하셨습니다. 전 그 때 아직 20대 초반 나이였습니다. 시골 장에 제가 입을 만한 옷이 과연 있을까요? 어머님을 따라 간 5일장에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입는 형형색색의 옷들만 가득했습니다. 어머님은 그 중 한 옷가게로 가시더니 어머님 연세에나 입을 실 법한, 편한 고무줄 바지 하나와, 추울 때 입으라며 예쁘지도 않고 따뜻하게 보이기만 하는 잠바 하나를 사주셨습니다. 전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머님은 저에게 마음에 드는지 어떤지는 전혀 묻지도 않으시고, 어머님 마음대로 결정하고 돈을 내셨습니다. 아버님이 주신 10만원 중에 바지와 잠바를 산 3만 5천원을 빼고 나머지 돈도 어머님이 모두 가져가셨습니다. 아버님께서 용돈으로 저에게 처음으로 주신 돈인데 맘에도 들지 않는 옷을 사게 되고, 나머지 돈 마저 어머님께서 가져가자 얼마나 그날 속상하고, 기분이 나빴는지 모릅니다. 시골 아주머니들 입는 옷을 사 입고 온 그날, 아직도 장롱 안에 있는 그 옷을 보면 아무 말도 못하고 어머님 뜻대로 그 옷을 사와야 했던 그 때 생각에 혼자 피식 웃습니다.
어머님은 항상 저에게 ‘야!’ 라고 부르셨습니다. 지금도 누구 어멈아! 할 때 빼고는 그냥 대부분 ‘야!’ 라고 부르십니다. 그래서 전 한국에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를 땐 모두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곧 한글학당에 나가 한글을 공부하게 되면서 저희 어머님만 저를 그렇게 부르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처음엔 어머님이 절 무시해서 저렇게 부르시는 건 아닐까 나쁜 생각 먼저 들었습니다. 왜 다른 시어머니처럼 ‘새아가~!’ 라고 절 불러주지 않으실까 궁금했습니다. 한글학당에서 만난 언니들 말처럼 저를 깔보고 무시해서 그러는 것일까 속상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한글 배우러 한글학당에 나간다고 했을 때 못 가게 하셨나 봅니다. 여자가 바깥바람을 쐬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고, 여자는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애나 키우면 된다고 항상 저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나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어머님에 대한 오해는 갈수록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머님은 저에게 남편이 벌어오는 돈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남편의 통장을 주지 않는 이유는 외국 며느리를 들이면 꼭 재산을 챙겨 도망을 간다고, 특히 중국 며느리들은 더 그런다고, 제 앞에서 중국인들을 얕잡아 보듯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가 고향 생각이 나 가끔 해 먹는 중국 음식 타박도 하시고, 기름 값도 비싼데 왜 기름 많이 들어가는 음식을 해먹고 있냐고, 그래서 기름 값도 더 들어가는 것 같고, 그렇게 먹으면 건강에도 좋지 않은데 꼭 그 음식들을 먹어야 겠냐며 항상 타박이셨습니다.
속상한 마음, 시어머니가 미운 마음이 가득해 위로나 받으려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항상 친정엄마는 저에게 참고 살라고만 하셨습니다. ‘어른이 하는 말씀이니 너에게 득이 되는 말씀만 하는 거야! 그러니 네가 조금만 참고 살면 곧 이해하고 풀어가는 과정이 올 테니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하고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또 친정엄마는 한국은 특히 어른에 대한 예의가 바른 나라이고, 시골 분들이니 절약하는 습관이 몸에 배셨을 테고, 기름진 음식을 많이 안 드셔보셨기 때문에 제가 해준 음식이 입에 안 맞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친정엄마의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니 어머님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트집처럼 느껴졌던 어머님의 잔소리가 사실은 한국생활에 빨리 적응해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인도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아기야!’ 라고 부르지 않고, ‘야~!’ 라고 부르는 것도 제가 편해서 그렇게 정감 있게 부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여 친척 분들 앞에서 중국에서 왔다고 책잡힐까봐 걱정되셔서 제가 하는 말 중에 잘못된 표현이 있으면 일일이 알려주시고, 행여나 적응 못하고 아들과 사이가 나빠져 나쁜 생각을 하진 않을까 노파심에 걱정 되서 하셨던 잔소리들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고 나니 그 동안 잔소리와 타박으로만 들렸던 어머님의 말들이 새삼 소중한 가르침 하나하나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힘들게만 느껴졌던 시골의 농사 일이 이제 재미있어졌습니다. 맑은 공기와 예쁜 새소리에 일어나고, 텃밭에 가꾼 상추도 따고 오이와 고추도 따고, 동글동글한 감자와 고구마도 캐보고, 파릇파릇한 밥상을 차리고, 맑은 시골만큼이나 저도 건강해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도 아들과 딸을 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나니, 친정엄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보다 더 함께 살고 있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저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어머님은 어머님을 뺀 가족 모두를 위해 한 평생을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남편이 벌어 온 돈을 아끼고 아껴 큰돈으로 만들어 저희에게 돌려주시고, 손자, 손녀를 위해 뭐든 다 해주시는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남편을 아주 착하게 잘 키워주셨고, 그런 소중한 남편을 부족한 저에게 주셨고, 부족한 저를 하나하나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머님이 계셨기 때문에 제가 낯선 곳에 와서 잘 적응할 수 있었고, 이만큼 행복한 가정을 꾸려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오지 않았다면, 지금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니 지금의 어머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제가 과연 다른 곳에서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어머님! 처음엔 어머님 말씀이 왜 그렇게도 아프게만 느껴졌을까요? 저도 아이를 낳고 힘들게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과 가끔 싸우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보니, 새삼 더 어머님의 도움이 크게만 느껴집니다. 말은 차갑게 하시지만, 그 속뜻은 누구보다 따뜻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이 적극적으로 응원해주셔서 한글도 잘 배울 수 있었고, 고등학교도 마치고, 대학교도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 혼자서는 꿈도 못 꿀 일을 어머님 도움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말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항상 어머님의 큰 사랑을 저도 느끼고 있답니다. 어머님! 지금 연세도 많으신데 항상 건강하셨으면 하고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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