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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도순 열심히 사는 행복한 우리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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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정자 작성일12-06-05 17:25 조회17,7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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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순도순열심히 사는 행복한 우리 가족

 

                                                                 허정자

 

한국생활을 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자상한 남편의 목소리에 푹~ 빠졌을 때, 25세 때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면 우습기만 하다.

 

10년 전, 지금 세상을 떠난 친정아버지의 소개로 한국의 남편을 만날시, 어머님과 국제통화를 하던 중 나한테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아가야, 내 아들은 마음이 착하지만 돈이 없어. 만약 네가 한국으로 온다고 하면 약 1000만 원짜리 전세방은 마련해 줄 수 있어. 네가 이런 남자랑 살아도 괜찮다고 하면 나도 반갑게 맞아 줄 준비가 다 되어있단다.”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동안 많은 고민을 한 끝에 한국으로 오기로 결정을 하였다. 왜냐면 나는 한국에 시집 갈 생각이란 전혀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친정아버지는 미리 시댁에 가보시고 사윗감도 만나보셨다. 그 당시 친정아버지께서는 남편이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고, 남편은 사곡농협에 다니고 있었는데 직업이 괜찮았고 정직해보였기 때문에 딸한테 소개해주신 것이었다고 하셨다.

 

한국에 처음에 왔을 때, 의사소통의 어려움, 문화차이 갈등, 부부사이 갈등 외로움 등의 온갖 곤란들이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기고 있었다.

어느 하루, 시아버님의 제삿날에 시댁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는데 어머님께서 저한테 “냉장고에 술이 남아있는지 확인 좀 해봐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확인한 후 “어머님, 냉장고에 술이 안 계셔요.”라고 했는데 이때, TV시청을 하고 계시던 식댁 식구들은 웃음보가 터진 듯이“하하하! ”하고 웃고 계셨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남편한테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술한테 존댓말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의 얼굴색은 빨간 사과처럼 빨간색으로 변했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중국어에는 존댓말이 없는데 한국어에는 밥, 집, 자다, 아프다 등 명사는 물론 동사에도 존댓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10년 동안 한국생활을 해왔지만 경우에 따라 존댓말을 잘 사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 거기에다 외래어들도 많이 사용하다보니 낯선 단어들로 인하여 한국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원활한 소통을 하기엔 역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다정하신 시댁어르신들과 남편의 배려 하에 나는 모든 어려움에서 잘 벗어날 수 있었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유지 할 수 있었다.

 

25세 때, 철부지인 나는 한국에 금방 왔을 때 어머님께서 매일 나한테 아침밥을 하셔서 챙겨주시고 회관에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늘 나한테 가져다주시군 하셨다. 큰 아주버님께서는 나를 친딸처럼 이뻐해주셨고 형님께서도 내가 친구가 없어 심심할까봐 형님의 친구네 집으로 데리고 가셔서 꽃꽂이를 배울 수 있도록 해주셨다. 시누들도 마찬가지로 고추장, 청국장, 김장김치를 직접 만드셔서 가져다주신다.

 

이후 나와 남편은 믿음과 사랑의 결실 끝에, 2003년 8월10일에 큰 딸아이 재영이를 낳았고 사랑의 열매인 재영이의 탄생으로 우리 가족들은 화목한 웃음으로 가득찼다.

재영이는 태어날 때부터 잘 먹고 잘 자는 순둥이었다. 까마잡잡한 피부에 머리카락이 길어서 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포도 알 같은 두 눈, 앵두 알처럼 빠알간 입술은 한눈에 듬직함을 엿 볼 수 있는 우리가족의 소중한 천사였다.

나는 재영이가 첫 아이다보니깐 나는 똑똑한 아이로 키우기 위하여 많은 정성을 쏟았다. 15개월부터 재영이한테 ‘아가노벨’이란 학습지로 공부를 시켰고, 매일 동화책을 읽어주고 음악도 들려주었다. 재영이는 5세부터 한글을 깨칠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치원 생활도 별문제 없이 잘 적응하여 우리 부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재영이가 어느 덧 3학년 초등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 온 재영이는 나한테 당황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엄마, 엄마는 중국에서 와서 중국 사람이고, 아빠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 사람인데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야?”라고 물으면서“우리 반 친구들이 궁금해 한단 말이야.”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재영이한테 “넌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깐 당연히 한국 사람이야.”라고 하며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자긍심을 말해주었다.

엄마가 중국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재영이는 전혀 다문화가족아이라는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심지어 학교친구들한테 가서 엄마가 중국어 통번역지원사로 일을 하고, 학교에 가서 풍선아트 봉사활동도 하며, 유네스코 학생들에게 다문화강의도 한다는 둥 자랑을 느려놓고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지금까지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준 재영이는 학업성취도 평가는 물론이고 그림그리기 대회, 독서활동에서 상을 타오며 며칠 전에 교내 영어말하기 대회에서도 상을 받게 되었다. 나는 무엇보다 재영이의 도전정신에 대하여 칭찬을 해주었고 원래 약속한대로 수상을 하게 되면 재영이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사주기로 하여 사주면서 다음에는 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다. 이런 재영이가 있어서 나는 학교에 가도 뿌듯하고 이것이 바로 자녀를 키우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느라 많이 놀아주지 못하여 늘 미안한 마음이고 엄마 못지않게 동생을 잘 챙겨주는 재영이를 보면 기특하여 고마움을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한편 우리부부는 재영이의 외로움을 달래고 더욱 풍성한 가족을 꾸려가기 위하여 우리부부는 재영이한테 ‘동생’이란 선물을 주기로 하였다.

2006년 10월 30일에 둘째 유진이를 낳게 되었다. 건강하고 예쁜 아기를 낳았더니 남편은 너무 기뻐서 며칠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진이가 예쁘고 밝게 자라주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소중한 존재일수가 없었다. 지금은 7세로 유치원생활을 즐겁게 하고 있으며 한글을 깨치기 위하여 집에서 구몬 학습지도 열심히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유진이를 “애교 쟁이, 떼쟁이, 수다쟁이, 멋쟁이, 정리 왕 ”이라고 부르며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막내는 커갈수록 점점 애기 같아 보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유치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유진이는 마치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이 아빠한테 “아빠, 나 맛있는 거 사줘…….응?”라고 졸라댄다. 만약 안사주면 사줄 때까지 동네가 떠나갈 듯 울기 시작하고 아빠가 안 되겠다 싶어서 사주면 “아빠, 사랑해~아빠 최고야!”라고 이쁜짓을 하기도 한다.

아침이 되면 거울 앞을 떠날 줄 모르는 유진이는 나한테 머리끈으로 어떤 모양의 머리를 묶어달라고 주문을 한다. 그리고 유치원 가기 전에 매일과 같이 중복되는 전쟁이 시작된다. 유진이는 옷차림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갖는다.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예쁘다고 하면서 매일 예쁜 치마만을 선호하면서 혼자 골라서 입고 가며 신도 운동화 보다는 예쁜 핑크색 구두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유진이는 인정은 참 많은 아이다. 본인이 즐겨먹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늘: “아빠, 엄마 드실래요?”라고 아빠, 엄마를 배려하며 예쁜 짓을 많이 한다. 주말에 아빠가 일하러 가시고 안계시면 눈뜨기도 바쁘게 “엄마, 아빠는?”하며 아빠를 찾는다. 아빠도 마찬가지로 일터에 나가서 점심시간이 되면 딸을 보고 싶어서 꼭 전화를 걸어서 유진이의 목소리를 확인해야만 일이 잘 잡힌다고 한다. 남편은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두 딸들을 생각하면, 일이 힘들고 몸은 고달프지만 에너지충전이 잘 되어 일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유진이가 유치원생활을 잘 적응하고 건강하게 밝게 자라줘서 마음속깊이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끝으로 나의 부족함을 감싸주고 묵묵히 아이들의 뒷바라지와 아내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동반자’가 있다.

169cm의 키에 입목구비가 뚜렷하고 얼굴은 햇볕에 많이 타서 까마잡잡하다. 겉보기엔 무뚝뚝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상하고, 가정적이고, 생활력이 강하며 애교가 넘치는 매력적인 남자이며 현재 공주농산에 다니고 있다.

내가 지금 편안한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남편의 지지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직장의 문턱조차 두드려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실 워킹 맘 여성들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직장생활을 하랴, 집안일을 하랴, 아이들을 챙기랴…… 상상하기가 두려워진다. 그런데 내가 3년 동안 공주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중국어통번역지원사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큰 아이의 학교등교, 아내의 출퇴근을 시켜주는 남편은 이 모든 가정 부담을 묵묵히 도맡아 분담해준 자상한 남자이다.

예전에는 남편이 평일에 직장생활을 하고 주말에 틈이 생기면 아이들과 함께 재미있게 놀아주는 자상한 남편이었지만 요즘은 아파트와 차를 장만하면서 진 빚을 갚기 위해 주말에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서 경제적인 어려움도 해결해야 하지만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하여 마음한구석 늘 아이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하는 남편을 보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나는 ‘오순도순 가족’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나의 동반자가 영원히 건강하길 만을 기도한다.

 

또한 아이들은 늘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아빠는 일터에 가고 엄마랑 함께 놀지만 아빠가 함께 놀아줄 때만큼보다는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아빠를 보고 싶다며 찾는다.

한 사람의 부족으로 인한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어 마음 한구석은 늘 쓸쓸하지만 우리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늘 미래를 꿈꾸며 행복을 소중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오순도순 열심히 생활하는 순박한 가족이다.

사랑해요! 행복한 우리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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