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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두번째 나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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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배유나 작성일12-04-25 13:00 조회18,1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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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두 번째 나의 고향

 

 

 

한국이라는 나라에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잘 살아보겠다는 큰 꿈을 갖고

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국에 찾아와 생활 한 지 벌써 6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사랑하는 남편과 그 사이에 귀엽고 예쁜 은비와 보람이가 생겼다.

 

남편은 당진에 직장을 생활을 하며 한달에 한번오고 나역시 직장을 다니고 혼자 아이둘을 키우며 정신없이 살고 있다. 나의 베트남 고향은 점점 멀어져 갔다. 가끔 부모님한테 전화 해서 부모님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위로이고 겉으로는 잊은 듯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엔 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한국에 처음엔 왔을 때 지금까지 남편의 도움없이 두아이를 키우며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 몸이 치져가고 이곳에서 삶을 포기하고싶은때또 있었습니다.그런때마다 베트남 가족들이 더 생각나고 그려워진다. 특히 아이를 낳았을 때 미역국조자 끓어 줄 사람이 없어서 서러워서 울고 또 울고 또 울었다. 나의 베트남 고향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러다가 대전시 주최로 외국인 말하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타게 되어 베트남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2010년 6월달 베트남에 가기로 하였다.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고 가슴 설레며 몇일 동안 설레임과 기쁨으로 들떠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남편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혼자 두아이를 데리고 베트남에 가는 것을 서운하긴 했지만 난 그것 만으로도 행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고향에 가는 길은 설렘과 기쁨의 양만큼 어렵고 힘들기도 했다. 떠나기 전부터 작은 아이 보람이가 감기 증상이 있어 칭얼대는 데다가 비행기에 탑승해서도 안전벨트를 메지 않고 비행기 안을 마구 돌아다니는 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큰 아이 은비마저도 처음 비행기를 타는 두려움으로 내 무릎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이륙 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보람이가는 열이 나고 설사가 시작했다. 얌전하게 앉아있지 못하고 앞자리 앉았던 사람의 머리를 막 잡아 당기며 장난을 쳤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고 기내의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는 것을 보며 미안함은 말할 수도 없고 넋이 나갈 듯 꼼짝 할 수 없었다.

 

거기다가 비행기 타고 4시간이면 도착한다고 해서 7장의 기저귀를 준비했었는데 기저귀를 모두 쓰고도 쓸 수 있는 휴지까지 다 썼건만 아이의 설사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투정부리고 억지를 쓰고 소리를 지르고 소화가 되지 않는 지 아이의 똥에서는 구역질 날 것 같은 냄새가 비행기 안을 채웠다. 또 처리한 기저귀를 승무원은 바닥에 그냥 버리라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그 처리물을 내 가방에 넣어 두었으니 주변 사람들의 눈총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아이라도 그 지독한 냄새에 내가 죽을 것 같았다. 평소에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예쁘다고 자랑하고 다닌 내 아이들을 비행기에서 어디라도 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고 힘들었다.

 

고향 가는 설레임으로 점심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그냥 비행기를 타서 배고프고 아이들에게 시달려서 지칠대로 지친데다가 그 날 비행기 안에서의 최고 사건은 내 치마에 보람이가 똥을 싸 버린 일이다. 이제 기저귀도 없고 댈 것도 없어서 될대로 되라고 그냥 아이 둘을 안고 있었는데 기내에서 식사가 나와 밥을 먹으려고 하는 순간 가장 이쁜 옷으로 폼을 내어 입고 온 내 치마에 끈적하고 누런 똥이 여기 저기 묻어 있는 것이 아닌가? 기가막혀 ...........아무리 내 아이의 똥이라도 왜 이리 더럽고 냄새나고 창피했던지 ....밥도 못먹고 기절할 뻔 했다.

그래도 3시간 쯤 지나서는 아이들도 지쳤는지 잠들기 시작했다...저절로 입에서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가 나왔다.

 

이렇게 힘들게 베트남에 도착했으나 거기서도 어려움은 계속됐다. 집 앞의 길은 넓어지고 여기저기 새로운 건물이 생겨서 집 주변에 와도 여기가 어디쯤인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집이 아닌 것 같이 낯설었고, 6년동안 한국의 날씨와 햇빛에 익숙해진 나는 베트남의 햇빛은 너무 강렬했고 몸에 닿는 끈적함이 기분나쁘고 견딜수가 없어 집에 가자마자 옷을 다 벗어버리고 싶을만큼 날씨도 힘들게 했다.

 

가족과 친척을 만난 기쁨과 행복은 잠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을 데리고 또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병원을 다녀 와서도 아이들은 베트남의 과일, 음식이 이상하다고 칭얼대며 전혀 먹지 않으려 했고 한국 음식과 과일 만 달라고 졸라댔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님에게도 가려고 하지 않으니 부모님에게도 미안했다.

 

거기다가 보람이는 한 달이 못가 설사병이 도져서 입원을 다시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은 근처에도 못 오게 하니 꼼짝없이 병원을 나 혼자서 지켜야했다. 병원 시설도 좋지 않고 전기 시설도 완전하지 않은 고향에서 아이들의 병은 쉽게 낫지 않았다.

 

고향에 오면 보고싶었던 친구들과 마음껏 놀고 고향 음식도 실컷 먹으며 빠졌던 살도 좀 찌워 가려는 즐거운 일만 상상했는데...이게 웬일인가? 그 꿈은 어디로 가고 날로 더 살이 빠져 가고 있었다. 정말 이건 아니잖아!!.... 죽을 맛이었다.. 일 주일이 멀다고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를 계속했다. 아이들이 원망스럽고 어디다 갖다 버리고 싶은 생각이 나니 점점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더 견딜 수 없게되어 돌아오려던 날짜를 앞당겨야 했다.

기대하고 꿈에 부풀었던 고향을 그렇게 힘겹게 다녀왔다.

 

항상 가고 싶고 꿈 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고향이었는데 가서 보니 이제 그 곳이 내 가 살 곳이 아닌 것 같았다. 한국이 내 집이고 고향이 되어버렸다. 한국에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많고 내가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문화 가족 사랑회의 사람들과 한국어를 친절히 가르쳐 주는 선생님도 계시다. 설사병 쯤은 쉽게 낫게 해 줄 한국의 병원과 의사 선생님이 그립고 아이들의 유치원과 유아원 선생님들도 빨리 보고 싶었다.

 

설 때마다 같이 만들어 먹었던 떡국, 김장철이면 함께 담가 먹었던 한국 김치,

추석 때 송편과 같은 한국 음식도 생각나고 항상 열심히 살아가라고 응원해주고 도와 주었던 한국 사람, 그리고 그들과 만들었던 4년의 여러 가지 이쁜 추억들이 베트남을 떠나면서 더 그리워지고 빨리 한국에 오고 싶어졌다.

 

이제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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