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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끌어준 한글, 나를 찾게 해준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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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소연 작성일12-05-21 10:41 조회18,4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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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끌어준 한글, 나를 찾게 해준 한글

 

저는 중국 요녕성에 위치한 공업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그 곳은 사계절 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곳이고, 겨울이 되면 도시 한가운데로 흐르는 물이 얼어 즐거운 얼음 놀이터가 되는 활기찬 곳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곳을 떠나 한국 사람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와 살아온 시간이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지금 저는 홍성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시부모님과 남편, 아들, 딸 이렇게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현재 다문화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고, 열다섯 명의 하숙생들과 함께 생활하는 하숙집 주인이기도 합니다.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바쁜 생활 속에서도 한국에서의 제 자리를 하나하나 만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인내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이주 여성들은 처음 한국으로 왔을 때 언어 때문에 큰 곤란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따뜻한 대화를 해나갈 수도 없고, 시부모님과 친척들과 편하게 대화하지 못해 오해가 쌓이는 일이 잦고, 예쁜 아이가 태어나도 아이에게 한국말로 엄마로써 너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껴주고 있는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마다 한국의 낯선 시골마을에서 저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함께 있지만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 함께 있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몸만 여기 있을 뿐이고 제 의견을 전달하지 못하는 답답함에 외롭고 쓸쓸한 시간들이었습니다.

한글을 잘 알지 못하고 한국말에 서툴다는 것 때문에 시댁 식구들과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있었고, 아이들을 키우는데도 애로사항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어를 정말 열심히 배워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 시부모님과 남편은 제가 한글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워보고 싶다고 이야기 하자, 일이나 하고, 살다보면 배워지는 말을 뭐 하러 시간 내서 배우냐며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아이를 키우면서 고생하는 저를 보고 마음이 바뀌셨는지 시부모님이 먼저 한번 나가서 배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한글학당에 나가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힘들었지만 하나하나 배워가는 일이 무척 재미있었고, 그러던 중 선생님의 권유로 홍성방송통신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방송통신고등학교라서 매일 나가서 수업을 듣는 일은 없었지만, 국어, 수학 등등 여러 가지 과목을 공부하고 시험을 보려니 무척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함께 공부하는 언니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학교를 마칠 수 있었고, 저는 더 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글만 배워도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시부모님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고, 아이들의 한글 숙제를 봐주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하는 소소한 일들만 할 수 있게 되어도 너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막상 한글공부를 시작하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나니 대학에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대학에 간다고 하면 남편은 뭐라고 할까, 시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너무 걱정됐지만 용기 있게 저의 의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제 입장이 너무 확고해서 남편도 시부모님도 저의 뜻을 말리지 못하셨습니다. 물론 시어머니는 아직도 제가 많은 활동을 하는 것에 약간 불만이 있으신 듯 보이긴 하시지만, 그럴 때면 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집안일도 더 열심히 하고 아무튼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드립니다.

그렇게 저는 2009년 혜전대학 아동복지학과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이 많았지만 학과장님과 여러 차례 상담하고 조언을 구한 끝에 저도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다행히 고등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언니 몇 명이 함께 진학해서 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2년은 정말 빨리 지나갔습니다. 힘들게 시험을 보고 과제를 해내고, 어린이집과 사회복지 현장 실습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당당히 전문학사 졸업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졸업식 날 얼마나 기쁘고 떨렸는지 모릅니다. 한국으로 와 힘들었던 시간을 모두 보상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오늘 여기가 끝이 아니고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하고 마음 속 깊이 그 꿈을 심었습니다.

그래서 전 청운대학교 중국어학과로 다시 편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어학과라서 편하겠다는 생각도 잠시, 중국어 수업은 편하지만 거의 대부분 한국어로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일도 많고, 교양 수업 같은 경우에는 한글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직 전문용어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저로써는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제가 이토록 한국어를 배우고, 또 더 나아가 다른 공부까지 하게 된 데에는 중요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계기는 제가 몇 년 전 집근처 교회에 다니며 그곳에 있는 한글학당 봉사를 다니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제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몇 집 없었던 다문화 가정이 어느새 점점 늘어나게 되면서 교회에서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위해 한글학당을 운영하였습니다.

그 중 중도입국 청소년인 「김애리」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다문화 가정이 늘수록 중도입국청소년들도 많이 늘었습니다. 애리는 중국인이었고, 엄마의 이혼으로 한국으로 오게 된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애리는 아주 예쁘고 귀여운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애리는 아직 ㄱ, ㄴ, ㄷ 조차 몰랐던 아이였습니다. 애리의 가정환경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애리가 살고 있는 집은 얇은 창에 겨울 찬바람이 그대로 들어와 매섭게 살갗을 파고드는 그런 집이었습니다. 보일러도 고장이 나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항상 얇은 전기장판으로 춥게 겨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버텨내기에 그 아이에게 처한 환경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저는 애리 집에 찾아가 함께 한글 공부를 했습니다. 얇은 전기장판에 몸을 누운 체 함께 이불을 머리까지 꼭꼭 덮고 한글 공부를 했습니다. 중국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을 보내고 온 애리의 기초학력은 이곳 아이들과 비교해 턱없이 떨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초등학교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 하고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교과서를 구해 애리에게 주었습니다. 한글을 착실히 공부해 가는 애리가 스스로 교과서를 읽을 수 있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애리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을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애리와 함께 수학, 과학, 역사를 함께 공부했습니다. 제가 먼저 알아야 애리에게 알려줄 수 있었기에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항상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는 애리와 함께 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고,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도 먹고, 한국에서 같은 또래 친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려주고 체험시켜주고 싶었습니다. 한국음식도 먹어보게 하고 싶어 함께 배추김치도 만들고, 깍두기도 담고, 된장찌개도 끓여 맛있게 먹었습니다. 애리가 한글을 배워갈 수록, 애리가 한국 문화를 하나씩 알아갈 수록, 어느새 이곳 한국에 애리의 자리 하나가 마련되어진 것 같습니다. 그 아이 스스로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의 위치는 어디쯤인지 알아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김 애 리」세 글자를 잘 새겨 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ㄱ이 뭔지 ㄴ이 뭔지도 모르던 아이는 이제 제법 여러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해낼 만큼 훌륭한 한국어 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왔다고 친구들이, 언니들이 “야! 너 중국에서 왔다면서? 그럼 중국말 좀 해봐! 못해?”하고 놀릴 때 마다,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며 떼 쓰고, 시무룩해 있던 그 아이는 이제 없습니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된 애리는 한국말도 잘하고 발음도 너무 좋아지고 성적도 반에서 중상정도를 하고 있는 어엿한 한국 청소년이 되었습니다.

이 아이와의 첫 만남을 그저 그런 만남으로 여기고 쉽게 대했다면 어떠했을까! 아직 한국말조차 서툴러 어울리지 못한 애리를 봤다면 어떠했을까! 생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잘 자라주어 얼마나 볼 때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제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 와주고, 낯선 환경에서도 잘 자라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애리를 보며 오히려 제가 무언가 더 큰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살게 된 10년 동안 집안일, 학교 공부, 엄마, 아내, 며느리로써의 삶을 바쁘게만 살았지, 제 모습이 무엇인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작은 도움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찾게 된 애리를 통해 저도 제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한글봉사를 하면서 만난 아이들이 변해갈 때마다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제 모습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 저는 그냥 현실이 답답해 한글을 배우고 싶어 무작정 학교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한글을 배우다 보니 주변 사람들과 대활할 수 있어 좋았고, 더 이상 시부모님과 오해를 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편했고, 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 배움의 열정이 이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낍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잠깐씩 맡아 하던 홍성군 다문화센터에서 다문화가정의 부모교육과 자녀교육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진짜 제 모습을 찾았습니다. 작은 교회의 한글학당에서 시작된 작은 봉사가 이제 당당히 제 직업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한글로 인해 불편한 그들의 삶을 남보다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작은 것 하나라도 챙기려했던 제 노력에 그들이 달라지는 것이 보일 때마다 전 더 행복해졌습니다.

다문화가정의 이주여성들은 저를 보며 위안을 삼고, 저를 보며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도 항상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렇게 해냈으니, 여러분들도 해낼 수 있습니다. 노력하시면 꼭 꿈을 이룰 수 있어요. 쉽게 좌절하지 마시고 노력하세요!” 수줍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따뜻함이 가슴 안에 가득 찹니다.

한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저를 학교로 이끌었고, 학교에서의 배운 한글은 다시 저를 작은 한글학당의 봉사로 이끌었습니다. 꼭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던 애리와의 만남은 저를 더 큰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로 이끌었고, 그 기회로 저는 진짜 ‘나’를 찾게 되었습니다. 봉사와 다문화가정 교육을 통한 따뜻한 경험들을 통해 제가 잊고 있었지만 바라왔던 작은 꿈을, 제 모습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또 이 기회들이, 경험들이 저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또 저는 지금과는 다른 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은 저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 주었고, 한글은 숨겨져 있던 제 모습을 찾게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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